기원이 불확실한 피레네 산맥 소수 민족, 바스크족
바스크 지역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스페인에서 독립을 굉장히 열심히 시도했지만, 지금은 독립 시도를 그만두고 자치지역으로 남은 지역입니다. 스페인 피레네 산맥에서 카탈루냐가 동쪽 끝에 있다면 바스크는 서쪽에 있는 스페인 북부 지역에 위치해 있습니다. 바스크 사람들은 현재 바스크라고 명명되어있는 지역과 그 주변 지역, 피레네 산맥 너머 프랑스 지역까지 걸쳐 살고 있었던 사람들로 보시면 됩니다. 이 사람들이 쓰는 언어는 바스크어입니다. 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유럽 사람들이 쓰는 계통의 언어인 인도유럽어가 아닌 계통이 불분명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바스크족들은 기원이 조금 불분명하며 예전부터 이베리아 반도에 살던 민족 중 하나가 아닐까 하고 생각됩니다. 바스크족들은 다른 이베리아 반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로마, 서고트의 지배를 받은 다음 나바라 왕국을 세웠습니다. 카스 디야가 서쪽에 있고 동쪽에는 아라곤, 바르셀로나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나바라 왕국의 영역이 자꾸 축소가 됩니다. 그러다가 카스 디야와 아라곤이 합병되며 나바라 왕국을 점령하게 되면서 하나의 스페인 안에 들어가게 된 곳이 바스크입니다. 바스크 사람들은 자신들의 민족주의적인 운동을 시작한 것은 19세기쯤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산업혁명의 여파가 스페인까지 내려오면서 이곳은 먼저 산업혁명을 받아들이고 중공업 위주의 발전을 하게 됩니다. 바스크인끼리 살던 지역에 공장이 생기면서 일자리가 생겨 외부인들이 유입되기 시작합니다. 산업이 발달하고 외부인들이 들어오며 기존에 바스크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문화 전통적 사회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이러다 보니 바스크 민족주의자들은 우리의 민족성이 사라질 수 있겠다는 위기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어집니다. 이를 막기 위해 바스크 국민당이라는 민족주의 정당을 세우기도 합니다.
바스크 지역의 자치정부
바스크 지역도 제2공화국이 들어서고 나서 카탈루냐가 그랬듯이 자치정부를 수립합니다. 자치정부를 수립한 후 몇 년이 지나고 스페인 내전이 발생했을 때, 나치에서 바스크 사람들이 많이 사는 게르니카의 공중에 폭탄을 투하합니다. 그러면서 이 지역은 파시스트들에 의해 초토화가 되는 역사적인 기억을 가지게 됩니다. 게르니카의 참상은 피카소가 1937년에 벽화로 남기게 됩니다. 벽화는 프랑스의 세계 박람회에 전시하기 위해 피카소가 그린 그림으로, 절규하는 사람과 소 등이 많이 그려져 있는 슬픈 작품입니다. 이때 당시 바스크 정부 통계로는 1,600명 이상의 아주 많은 사람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바스크 사람들은 프랑코 정권, 파시스 정권에 대해 좋지 않은 시선을 가질 수밖에 없어집니다. 그리고 프랑코 정권에서 봤을 때 바스크 사람들, 즉 민족주의자들이 썩 좋을 리가 없습니다. 프랑코 정권에서는 분리주의를 완전히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모두 스페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반공정신도 매우 강조합니다. 그러다 보니 바스크 사람들을 카탈루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탄압하고, 그들의 문화를 말살시키고자 하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1950년대가 되면 프랑코 정권하에서 개혁개방정책을 펼치기 시작하며 산업이 발달하기 시작합니다. 이에 따라 경제적으로 부유해질 수 있으나, 외부의 노동자가 더욱 유입되기 시작합니다. 기존에 있던 시설도 부족한 실정인데, 중앙정부가 이에 대해 지원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바스크인들의 불만이 커지기 시작합니다. 자신들의 문화, 정체성이 훼손되고 희석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자유 조국 바스크 등장
이것에 대한 대응으로 자유 조국 바스크라 하는, 일반적으로 ETA라고 부르는 조직이 1959년에 등장합니다. ETA는 일종의 군사조직으로 보시면 되며, 스페인 정부에서는 테러리스트로 명명한 집단입니다. ETA라고 하는 조직이 1960년대에는 프랑코 정권을 상대로 테러도 저지르고, 요인 암살도 일으키며 정권에 반대하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인 단체로 볼 수 있습니다. 단체 운영비는 바스크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내는 경우도 있었으며, 주민들에게 혁 명세의 명목으로 돈을 걷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자금을 조달하다 보니 폭력적인 방식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후원을 하고 싶지 않아 합니다. 또한 반발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늘어납니다. 게다가 프랑코 정권이 1975년에 총통이 사망하며 끝나게 됩니다. 1979년에는 바스크 지역에 자치권을 되돌려줍니다. 자치권을 되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ETA는 지속해서 활동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스페인 정부에서는 ETA를 테러 집단으로 규정하고, 이에 가입하는 것이 불법이 됩니다. 그러면서 ETA의 수백 명의 회원들이 구금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시간이 지나, 자치권도 가지고 잘살고 있던 바스크임에도 ETA는 폭력적인 투쟁을 그만두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바스크 사람들은 ETA에 등을 돌리게 되고, 2000년에 정부에 휴전 제의를 합니다. 2017년이 되면 아예 무장해제를 하고 2018년에 자진 해산을 하며 60여 년에 걸친 ETA의 무장 투쟁이 모두 종료됩니다. 무장 투쟁이 종료되며 여태까지 받은 피해에 대한 통계를 보니, 800여 명 이상이 ETA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수치를 볼 수 있었습니다. 바스크 사람들이 많이 사는 바스크 지역은 중공업 위주로 발달을 했습니다. 1950, 60, 70년대에 많이 발달했었으나 중공업은 유럽에서 계속하여 발전하지는 못했습니다. 중공업이 인건비가 높은 유럽에서 계속 있을 수 없었기에 인건비가 싼 곳으로 빠져나가며 바스크 지역 특히 빌바오 같은 도시는 산업이 쇠퇴하는 현상을 겪게 됩니다.
바스크 지역의 문화 도시 육성
산업이 쇠퇴하면서 이 사람들이 다시 지역을 융성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 해결책으로 등장한 것이 문화도시를 육성하는 것이었고, 이를 실천한 곳이 빌바오라는 바스크 지역의 도시입니다. 도시가 경제적으로 침체기에 들어서자 리아 2000이라는 도시 재생 프로젝트를 벌이게 됩니다. 다시 중공업을 유치해서 먹고살기에는 힘드니 문화도시로 바꾸자며 구겐하임 미술관을 유치하며 문화명소로 다시 발돋움하고 있는 지역으로 빌바오의 기적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ETA의 활동은 끝났고, 바스크 지역은 다시 완전 독립을 하고자 하는 시도는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치지역으로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지역이라고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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