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칸반도, 러시아 분쟁, 분리독립, 소련 역사

카탈루냐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발생하게 된 과정

게임블루 2022. 7. 28. 15:03

카탈루냐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발생하게 된 과정

카탈루냐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발생하게 된 과정
카탈루냐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발생하게 된 과정

스페인의 전반적인 부분, 역사, 문화에 등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스페인에서 분리독립을 시도한 곳 중 제일 유명한,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한 카탈루냐 지역에 관해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이 지역은 여전히 분리 독립에 대한 시도가 끊이지 않는 상태로 볼 수 있습니다. 카탈루냐 지역이 어디인지 보자면, 피레네 산맥의 남동쪽 그리고 지중해에 맞닿아있는 곳이며 스페인의 동북부 지방입니다. 이곳은 카탈루냐어라는 자신들의 언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언어는 과거에 카탈루냐가 있었던 곳 바로 옆의 주변 지역들을 포함한 아라곤 왕국에서 사용하던 언어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언어를 가지고 있는 곳이며, 카탈루냐어는 위에 있는 프랑스어의 영향도 굉장히 많이 받은 언어로 볼 수 있습니다. 카탈루냐는 아라곤 왕국의 중심이었던 지역입니다. 이 지역은 예전에 로마가 지배하고, 서고트 왕국이 지배하고, 이후에는 프랑크 왕국이 지배했었습니다. 프랑크왕국은 스페인을 이야기할 때 잘 언급하지는 않는 곳입니다. 프랑크왕국은 유럽의 중앙부 지역을 점령했던 왕국으로 보시면 됩니다. 이후에는 프랑크왕국이 세 개로 쪼개집니다. 동, 중, 서 프랑크로 쪼개지는데 그중 서프랑크는 이후 프랑스가 되는 기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프랑크 왕국이 카탈루냐 지역을 함께 지배했었던 곳입니다. 그런데 이곳은 스페인의 아래쪽인 이베리아 반도 밑에서 이슬람 세력이 굉장히 많이 올라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가톨릭, 그때 당시의 기독교 중심의 세력이 프랑스가 카탈루냐를 일종의 방패막이처럼 이용했습니다. 이슬람 세력과 자신들 사이의 완충지대로 카탈루냐를 이용한 것입니다. 이곳은 카탈루냐 군주국으로 자신들이 바로 통치하는 지역이라기보다는 바르셀로나 백작이 이 일대를 알아서 통치하면서 이슬람 세력을 밀어 내주는 역할을 했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카탈루냐 지역 일대는 서프랑크가 된 프랑크 왕국과 관계가 친밀할 수밖에 없는 지역이었습니다. 바르셀로나 백작이 이 일대를 계속해서 다스렸는데, 이후에 '우리가 굳이 서프랑크와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는가?' '그들을 군주로서 모실 필요가 있는가?'라는 의문을 가지며 10세기에 서프랑크와의 관계를 단절해버리고 독립을 선포합니다. 독립을 선포한 바르셀로나 중심의 지역이 되었다가, 바르셀로나 백작이 바로 옆에 있었던 아라곤 왕국의 여왕과 약혼을 하게 됩니다. 나이가 아주 어린 페트로네랄 여왕이 왕위를 등극하게 되자, 아라곤 왕국도 자기 혼자서 독립을 유지할 수 있을지 위험한 상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아라곤 왕국과 카탈루냐 지역은 다시 한번 합쳐져 아라곤 연합왕국이 됩니다. 카탈루냐 지역은 바로 옆에 지중해를 끼고 있습니다. 지중해를 끼고 있기 때문에 지중해 무역을 하기에 탁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곳을 중심으로 해서 지중해 지역에서 무역도 하고 지중해의 섬들도 본인들의 영역으로 넓혀 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카탈루냐에 안 좋은 일들이 벌어집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은 아니지만, 국제 정세가 조금씩 바뀌게 됩니다. 바뀐 국제 정세로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오스만 제국의 등장입니다. 오스만 제국은 오스만 튀르크가 주도 세력이 되어 만든 커다란 제국입니다. 투르크, 즉 현재 터키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권입니다. 터키를 중심으로 계속 커간 오스만 튀르크가 자꾸 팽창합니다.

카탈루냐의 무역 쇠퇴

스페인은 서쪽에 있고 터키는 동쪽에 있는데, 오스만 튀르크가 자꾸 커지면서 지중해를 끼고 있는 지역을 접수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카탈루냐의 지중해 무역이 힘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를 믿고 있는 카탈루냐 지역의 사람들이 이슬람을 중심으로 한 오스만 튀르크로 인해 장벽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지중해 무역이 편하지 않게 되며 오스만 튀르크가 내륙에도 영향력을 뻗쳐 나가면서 육상 통로를 통한 무역도 쉽지 않은 상황이 됩니다. 그러면서 지중해 무역은 하나씩 쇠락해갈 수밖에 없어집니다. 지중해 무역이 쇠락해 나갈 당시 다시금 유럽의 부귀영화를 가져다주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대항해시대가 도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유럽 사람들이 더 큰 배, 뛰어난 기술을 만들기 시작하며 장거리 항해가 가능해집니다. 14세기쯤부터는 포르투갈을 시작으로 하여 대항해시대가 도래하여 큰 배를 타고 유럽뿐 아니라 다른 지역까지 진출하며 식민지를 만들고, 무역로를 트기 시작합니다. 이러면서 유럽에서는 오스만 제국에 막힌 지중해가 아닌 뚫려있는 대서양을 통한 무역이 시작됩니다. 이때는 14세기 후반경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카탈루냐는 대서양은 면해있지 않고, 지중해만 면해있기에 대서양 무역에 참여할 수가 없어집니다. 통합된 스페인에서 대서양 무역에 큰 이득을 본 곳은 대서양과 면해있는 지역, 특히 남부 안달루시아 지역의 세비야가 대서양 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하게 됩니다. 거기에다가 하나 더 생각해보자면, 아라곤의 왕인 페르난도 국왕과 이사벨 여왕이 결혼하게 되는 사건입니다. 이 둘은 공동 국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화면에 보이는 둘의 사진을 봅시다. 일반적으로 왕실의 사진, 그림을 그릴 때는 왕이 앞으로 나가서 더 크게 그려지고 가족들은 보통 작게 그려지는데, 둘의 얼굴이 거의 비슷한 크기로 그려져 있습니다. 즉, 둘은 같은 수준의 권력을 영위하면서 둘이 함께 국가를 이끌어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중해 지역은 점점 쇠락하게 되고, 대서양의 카스 디야 지역은 농사도 잘되는 등 떠오르는 지역이 됩니다. 따라서 정치는 마드리드, 하시더냐 중심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또한, 지중해 무역이 쇠퇴하며 카탈루냐의 경제가 함께 쇠퇴하게 됩니다. 즉, 정치력 경제력이 모두 다 쇠락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카탈루냐는 예전에 잘 나가던 국가였으나, 마드리드 중심의 스페인에서는 일개 주 정도로 위치가 강등됩니다. 그러면서 카탈루냐 지역에서는 '우리는 스페인의 변방이야'라는 인식이 확산합니다. 카탈루냐에서 특정한 의사결정이나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변화되는 국제 정세에 따라. 스페인이 통합되는 과정에서 변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근데 피해 의식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겠죠?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졌을 때, 카탈루냐는 이기지 못한 편에 서게 됩니다. 왕위 계승 전쟁으로 왕권을 잡은 펠리페 5세는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 출신입니다. 부르봉 왕조 출신의 펠리페 5세와 합스부르크 왕조의 신성 로마 제국 카를 6세가 싸울 때 카탈루냐는 신성로마제국의 편에 서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카탈루냐 자체가 합스부르크의 영향을 받는 지역이었기에 자연스러운 선택일 수도 있으나, 현재 스페인 왕권에 대한 불만을 이러한 방법으로 표현했을 수도 있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카를 6세는 카탈루냐 지역을 거점으로 삼고 들어와서 펠리페 5세와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전쟁을 14년간 치렀으나, 결과는 카를 6세의 패배로 돌아가게 됩니다.

카탈루냐의 전쟁 패배

이 전쟁의 끝을 장식한 전쟁이 바로 바르셀로나 공방전입니다. 카탈루냐의 중심인 바르셀로나 지역에서 1년이 넘게 전쟁을 했으나 카탈루냐가 패배를 하게 됩니다. 그 패배 일이 9월 11일입니다. 패전일인 9월 11일은 현재 카탈루냐에서 민족의 날로 기념하고 있는 날입니다. 카탈루냐가 부르봉 왕조 반대편에 섰습니다. 부르봉 왕조는 왕권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이 왕조는 카탈루냐가 탐탁지 않게 됩니다. 카를 6세가 그 지역에 기지를 구축하고 바르셀로나 공방전에서는 자신에 대항해 싸워왔기 때문에 눈엣가시로 여기며 반카탈루냐 주의를 표방하게 됩니다. 동시에 자치권을 박탈하고, 카스티야의 일개 주로 위치를 격하시켜버립니다. 이러한 사건을 겪게 되면서 카탈루냐 사람들 사이에서는 민족주의가 더 발응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카스티야의 변방밖에 안 되는구나', '우리의 고과도 있고 언어도 있는데 왜 이러한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지?'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이를 표출한 것이 '문화 회복 운동'입니다. 19세기에 카탈루냐 사람들 사이에 문화 회복 운동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19세기 말엽쯤 되면 우리에게 익숙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19세기 말에 카탈루냐 르네상스 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우리가 많이 들어본 '가우디, 피카소, 달리'와 같은 예술가들이 등장합니다. 특히 가우디 같은 경우 바르셀로나 도시계획에 참여하여 바르셀로나 고유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고자 하는 노력을 열심히 한 건축가이기도 합니다. 건축물이기 때문에 외관적으로 사람들에게 보이며, 카탈루냐 사람들이 '우리는 카탈루냐 사람들이다'라는 의식을 더 가지게 됩니다. 카탈루냐 사람들이 문화적으로 우월하다는 의식을 가지게 됨과 동시에 유럽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납니다.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은 독일을 거쳐 스페인까지 내려옵니다. 카스 디야 지역은 농업 중심의 사회이고 왕이 잘 돌봐주는 지역이었기에 공업발전에 대해 크게 괘념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카탈루냐 지역은 먼저 공업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또, 섬유 공업도 먼저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카탈루냐 지역은 공업 중심지역으로 성장하게 되며 스페인의 산업생산에서 높은 비율을 차지합니다. 이 지역은 경제적으로도 다시 부유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해지기 시작하면서 다시 한번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 갈등이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여기에서 다시 깨우침을 갖기 시작하며 민족주의 운동, 사회주의 운동이 함께 확산이 됩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들은 나중에 제2 공화국이 태동할 때가 되자 공화파에 서게 됩니다. 카탈루냐 사람들은 1931년 제2공화정이 설 때, 공화정이 들어서야 한다는 것에 표를 던지게 됩니다. 공화정이 들어서게 되자, 카탈루냐 사람들은 독립을 위해 '카탈루냐 공화국'을 선포해버립니다. 제2공화정의 입장에서는, 사람들이 표를 많이 줬으나, 독립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며 독립철회를 시켜버리고 자치를 할 수 있는 자치정부의 지위를 줍니다. 카탈루냐는 다시 자치정부를 가지고 지역을 운영해 나갑니다. 제2공화정이 들어오고 나서 카탈루냐는 자치를 하게 되고 공화국의 일환으로 자신의 지역을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그 이후에 앞에서 말씀드렸었던 스페인 내전이 발생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들은 이미 공화파가 주도하고 있는 지역으로 왕정에 반대하여 부르봉 왕조와는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공화파의 편에 서게 됩니다. 공화파의 편에 서게 되었으나, 내전의 결과는 프랑코 장군의 승리로 끝납니다. 그러면서 패전한 쪽에 서게 된 불운을 다시 한번 맞게 됩니다. 프랑코 장군은 파시스트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내셔널리스트라고 얘기는 하나 왜곡된 민족주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생각하는 민족주의란 '스페인 민족은 하나고 우리는 모두 하나로서 행동해야 한다'라고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즉, 우리는 모두 스페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카탈루냐의 자치를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정권이었습니다. 따라서 프랑코 정권에서는 카탈루냐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자치 정부, 자치 헌장, 자치권 모두를 회수해버립니다. 그러면서 중앙정부 밑에 있는 지역으로 다시 위치가 바뀌게 됩니다. 이와 동시에 카탈루냐 사람들의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것들을 모두 금지합니다. 특히, 카탈루냐어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사용한다든지, 출판물을 내는 등의 모든 행위를 다 금지해버립니다. 하지만 프랑코 장군이 사망하고 난 후 다시 자치권을 회수해옵니다. 프랑코 정권 당시에 카탈루냐 사람들은 자신의 민족성을 말살당하는 정책에 노출되어있었으나, 프랑코 정권은 1950년대에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개방 개혁 정책을 펼칩니다. 개혁 개방 정책을 쓰게 되면서 카탈루냐 지역은 이미 공업을 발전시켰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점점 더 금융업, 제조업 등을 발달시키면서 경제적으로는 더 융성할 기회를 가져옵니다. 경제적으로 더 잘살게 되면서 현대 사회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카탈루냐가 경제적으로 잘살게 되면서, 세금을 많이 내게 됩니다. 이후 이 세금은 중앙정부로 들어가 잘 못 사는 지역으로 부담금을 넘기게 됩니다. 카탈루냐 사람들은 카스 디야 중심의 삶에서 누리지 못하고 살았는데, 이제 잘살게 되니 세금을 가지고 가서 농업지역으로 배분을 해주는구나 하는 억울한 심정이 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카탈루냐 사람들은 우리끼리 지내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됩니다.

카탈루냐의 분리 독립 투표

이후 카탈루냐는 자치지역으로 머무를 것이 아니라 독립을 해야겠다 하는 생각을 하나 둘씩 하기 시작합니다. 표면화된 시도를 보자면, 2005년에 카탈루냐 지방 자치의회에서 독립국 지위를 부여하는 개혁법안을 통과시킵니다. 그다음 해에는 자체적인 헌법을 만들어버립니다. 이는 중앙정부에서 헌재에 기소하여 위헌이라는 판결이 납니다. 정치적으로 법적으로 독립하고자 했으나, 중앙정부에서 막았습니다. 하지만 카탈루냐 지역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2008년 미국 발 경제 위기가 스페인까지 내려오게 되자, 실업률이 오르는 등 살기가 불안해졌습니다. 하지만 카탈루냐 지역은 실업률이 다른 지역보다 낮았습니다. 이와 함께, 다른 지역을 먹여 살려야 하나?라는 의문을 가지고 중앙 정부에 대한 불만이 증폭되었습니다. 그러면서 2014년, 주민투표를 통해서 공식적으로 독립을 표현하게 됩니다. 카탈루냐 사람들은 2014년 9월에 있었던 스코틀랜드의 주민투표를 굉장히 예의 주시하며 봤습니다. 스코틀랜드가 분리 독립하면 그 분위기가 카탈루냐에도 올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스코틀랜드의 독립은 실패합니다. 그러나, 카탈루냐는 여전히 독립투표를 강행합니다. 독립투표는 중앙정부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불법 투표였기에 법적인 유효성을 갖지는 못한 선거였습니다. 하지만, 상징적인 의미는 있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이 카탈루냐의 독립을 원한다는 의견을 보여준 것이 2014년도의 주민투표입니다. 당시 투표율은 40%를 웃돌았고, 그중 80%가 독립을 찬성하는 선거 결과를 나타냈습니다. 하지만, 법적 효력이 없었기에 독립은 실패합니다. 그런 후 2017년에 다시 한번 분리독립투표를 합니다. 이때는 중앙 정부에서 더 강경한 태도를 보입니다. 계속된 독립 투표를 시행한다면, 자치권을 박탈해버린다는 헌법 조항을 들먹이며 이를 제재했으나, 자치 정부는 2017년에 한 번 더 독립 투표를 강행하게 되고 마찬가지로 독립 찬성이 압도적인 우위로 나타났습니다. 중앙정부에서는 이를 막았으며, 계속된 독립 시도를 보인다면 반역죄로 처단하겠다고 위협을 하고 실제 지명수배를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카탈루냐 사람들은 독립을 선언했고, 당시의 카탈루냐 자치정부 수장은 지금도 해외에서 망명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카탈루냐가 스페인에서 독립하고자 하는 이유는 일단, 카스티야 중심의 사회에 대해 반발을 하는 것입니다. 원래 언어와 문화의 차이가 있다는 이유를 들어서 이야기를 합니다. 또 경제적으로도 다른 스페인의 지역에 비해 잘살기 때문에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독립을 하여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습니다. 스페인의 중앙정부 입장에서는 잘 사는 지역을 놓아주기는 쉽지 않습니다. 못 사는 지역이라도 영토가 줄어드는 것은 중앙정부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일인데, 이 지역은 스페인 GDP의 20%를 차지하기에 놓아줄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카탈루냐 주민이라고 해서 모두가 독립을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선거에 참여한 비율이 40%가 조금 넘는 수준이기에 카탈루냐에도 독립을 반대하는 세력이 있다는 사실 또한 독립으로 이어질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또한 외부에서 봤을 때도, 카탈루냐에서 독립투표를 진행할 때마다 EU에서도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독립하면 EU에 들어오지 못한다거나, 기업의 본사들을 카탈루냐 지방에서 다른 나라나 지방으로 옮길 것이라는 위협을 계속해서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외부의 시선에서도 독립에 대해서는 탐탁지 않은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카탈루냐가 독립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나, 내외적으로 독립이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카탈루냐는 지속해서 독립을 시도하고 있습니다.